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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조롱·비하 대상…한류 이후 긍정·친근 전환

‘대지’ 3부작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펄 벅이 1960년대 한국의 농촌을 여행하다 농부가 소달구지에 타지 않고 소와 짐을 나눠서 지고 나란히 걸어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왜 달구지를 타고 편하게 가지 않느냐”는 질문에 농부는 “오늘 우리 소가 온종일 일을 많이 해서 피곤할 텐데 어떻게 타고 갑니까, 저라도 짐을 나눠서 지고 가야지요”라고 답한다. 이 말에 크게 감동한 작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을 봤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소설 ‘살아있는 갈대’의 첫머리에 이렇게 묘사했다. 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비로소 미국의 대중은 한국의 존재에 대하여 알게 된다. 1950~6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1970년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 ‘매시(M*A*S*H, 로버트 올트먼 감독)’와 1972년부터 1983년까지 CBS를 통해 방영된 드라마 시리즈 ‘매시’는 많은 미국인들에게 처음으로 한국을 접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할리우드의 한국인들에 대한 왜곡과 편견은 심각한 수준이었고 ‘매시’가 그 원조 격이었다. 기모노를 입은 한국 여성들, 베트남식 밀짚모자를 쓴 한국 남성 등 엉터리 고증이 많았다. 이 드라마의 영향으로 미국인들은 한국을 못살고 굶주린 나라로 인식했다.     1980년대 이후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한국인들의 모습 역시 매우 부정적이었다. 중국과 일본을 적당히 섞은 동양인, 일벌레, 돈벌레로 그려졌다. 스파이크 리의 1989년작 ‘똑바로 살아라(Do the right thing)’에서 흑인들은 “째진 눈(한국인)들이 뉴욕의 야채 가게를 다 차지했어”라며 조롱과 멸시를 보낸다.     평소 돈만 밝히고 흑인 고객들에게 무례했던 상점 주인은 영화의 피날레 폭동 장면에서 흑인들에게 가게를 습격당한다. 그는 그제야 짧은 영어로 “You, me, same”이라고 소리를 지르며 비열한 모습을 보인다. 이 영화는 미국 대중에게 한인들이 불친절한 돈벌레라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1992년 LA폭동 당시 한흑갈등이라는 주제 아래 이 영화가 자주 언급됐다.     한인들을 눈물도 인정도 없는 구두쇠로 묘사한 마이클 더글러스 주연의 ‘폴링다운(Falling Down)’(1993)은 한인을 왜곡하는 대표적 영화로 꼽혔다. 한인을 비하하는 노골적인 인종차별 때문에 한국에서는 영화 안 보기 운동이 있을 정도였다.     2000년대에 들어 K팝 스타들이 세계를 무대로 존재감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한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할리우드 영화 속에 한인이 대거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드라마의 획을 그은 작품으로 평가되는 2010년작 ‘워킹 데드(the Walking Dead)’의 메인 캐릭터인 한인 데릴은 중국인으로 오해를 받지만 점차 인종을 초월한 ‘멋진 남자’로 그려진다. 그러면서 점차 부각되는 그의 한국적 특성에 매료된 여성층 팬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글렌은 미국 여성들에게 ‘섹시한 남성’으로 어필된 최초의 한인 남성일지도 모른다. 그는 드라마에서 백인 여성 매기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결혼한다.     캐나다 CBC를 통해 2016년부터 2021년까지 방영된 ‘김씨네 편의점(Kim’s Convenience)’은 토론토 한인 이민 가정의 이야기를 그린 인기 드라마였다. 이민 1세 김상일은 일본에 대한 반감과 완고한 성격 때문에 2세들과 갈등을 빚는다. 그러나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인정 많은 아버지고 겉으로는 풍족해 보이지 않지만 사실은 엄청난 재산을 모은 성공한 이민 1세다.     그의 아내 김영미는 교회 활동을 중히 여기는 전형적인 한인 엄마다. 부지런하고 요리 실력이 뛰어나 갈비찜, 김밥, 꼬리곰탕, 약밥 등을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의 호의 덕에 사람들은 공짜로 김치를 먹을 수 있다.     ‘김씨네 편의점’에서처럼 드라마 속 한인들은 보수적이고 교회 활동을 통해 공동체적 정체성을 공유한다. 그러나 한인들의 교회는 종교 공동체라 하더라도 같은 민족의 상부상조 모임 성격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다른 인종이 끼어들 틈이 없다.   미주 한인들의 종교적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한 영화는 한인 2세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감독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이 영화는 아내 모니카를 신실한 교인으로 그리고 있는 반면, 교회로부터 상처받은 한인 이민자들의 모습도 솔직하게 표현, 종교의 부정적 측면을 비판하기도 했다.         기독교 안에서의 한인 2세들의 공동체 의식은 2024년 골든글로브 3관왕, 에미상 8관왕 ‘비프(Beef)’에서도 이어진다. ‘비프’는 한인 2세들에게 교회가 종교적인 공간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네트워크 역할을 하고 있음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해 미국인들에게 한인들의 종교와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비프’는 또한 한인 사회에 가부장제가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음을 간접 표현한다. 여성들을 만나기 위한 목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남성들, 교회 내에 만연한 성별 격차, 특히 교회의 모든 리더십은 남성들의 전유물이라는 사실 등에서 성차별을 느낀 여성 시청자들이 많았다.     이 드라마는 한국인의 타자 지향성과 체면 중시 문화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인다. 일례로 주인공 대니는 감정적으로 무너지고, 자살 충돌을 느끼고 있음에도 자신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애써 숨긴다. 그는 예배를 드리며 비애의 눈물을 흘리지만 아무렇지 않은 채 상황을 무마한다.     영화나 드라마 속 한인들은 대체로 무뚝뚝하다. 편견을 조성하고 불특정 소수를 일반화하는 엄연한 오류이지만, 영화와 드라마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생각보다 크다. 영화와 드라마 속 한인들은 인종차별과 왜곡을 충분히 경험해 왔다. 그러나 K팝, K드라마, K영화의 열풍이 지구촌 문화 흐름의 대세로 자리한 이후 한인들의 이미지가 상당히 개선되고 있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대중문화에 비친 한인의 이미지가 실제 우리의 모습이 아닐 수 있지만 세계가 우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지표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김정 영화평론가친근 전환 할리우드 영화 칸영화제 그랑프리 한국 남성

2024-09-25

동물로 사육된 남자가 던진 슬픈 문명 비판

인간이 만약 언어 교육과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않고 신체만 어른인 상태로 성장한다면 사회는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The Enigma of Kaspar Hauser)’는 독일 역사의 기이한 실화를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 특유의 실존주의적 시각으로 재해석한 걸작이다. 1960년대 라이너 베르너 파스판버, 빔 벤더스와 함께 독일 영화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뉴저먼시네마’ 운동의 3대 명장 중 한명인 헤어조크는 광기에 가까운 실존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감독이다. 그의 독특한 영화 방식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영화는 미스터리, 생존과 죽음의 본질, 비애와 비밀을 간결하고도 리얼하게 표현한다. 1975년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돕는다.’   성경 구절인 듯 들리는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속담에서 유래됐다. 영화의 독일어 원제 ‘Jeder fur sich und Gott gegen alle’를 번역하면,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살고 신은 그에 반한다’(Every Man for Himself and God Against All)이고, 이를 좀 더 풀어 말하면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살고 신은 모든 사람을 상대로 그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뜻이 담겨 있다. 1974년 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될 때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기존 속담의 반어법적 효과와 헤어조크의 실존주의적 성향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1828년 오순절 일요일 독일의 뉘른베르크 길가에 한 아이가 버려진다. 그의 이름이 ‘카스퍼하우저’이고 군인으로 징집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 한 장을 들고 있다. 모든 게 미스터리한 이 아이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어느 가난한 농부에 의해 지하실에 갇혀 동물처럼 사슬에 묶여 살다가, 그마저도 농부의 형편이 좋지 않아 버려졌다고 말한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의 기이한 모습에 의아해했지만 그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완전히 문명과 격리된 그의 백지상태는 사람들의 호기심 또는 지식인층의 실험의 대상으로 취급받는다. 서커스의 구경거리가 되어버린 카스파는 어느 교수의 집으로 도망을 한다.     교수는 몇 마디 말과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던 그에게 학문과 음악, 미술, 종교 등을 가르친다. 빠른 학습에 점차 ‘문명’에 눈을 뜨게 된 카스파의 말과 행동은 나름의 자아 세계를 형성한다. 곧 자서전을 쓰고 피아노를 연주하게 된 카스파의 존재는 정치적으로 상류사회에 당혹스러운 존재로 떠오른다.   그가 귀족 출신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카스파를 마을에 버린 망토를 두른 인물이 다시 등장한다. 사악한 이 자는 언어를 구사하게 된 카스파가 자신을 기억하고 사람들에게 말을 할지도 몰라 두려워한다.     세상은 카스파를 발견하고 카스파는 세상을 발견한다. 세상에 낯선 사람으로 온 현명한 바보 카스파는 사회를 받아들이고 싶어하지만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사회이다.  카스파에게 문명이란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는 도구이고 사람들은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그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들일 뿐이다.     학문과 논리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살고자 했던 카스파는 교수와의 대화 중에 그에게 모든 사람이 늑대였다고 토로한다. 그는 교회 회중의 침묵이 오히려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왜 피아노를 호흡처럼 연주할 수 없나, 라고 반문한다. 토론에서 종교와 합리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며 오만한 논리학자를 제압한다. 그는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과 마찰을 빚는다.   카스파는 1833년 두 번째 폭행을 당하고 가슴 깊숙이 칼에 찔린 채 살해된다. 사람들은 그의 기형성 또는 비정상성을 분석하기 위해 시체를 해부한다. 자신들의 지적 욕구를 위해서다. 공증인은 카스파의 뇌의 어느 한 부분이 변형됐다고 기록한다. 변형이라는 말 외에 더 나은 설명을 찾을 수 없던 독일 지식인들의 위선을 상징하는 듯, 영화는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공증인의 뒷모습으로 끝이 난다.     헤어조크는 카스파의 음울한 우화를 구체적이고 철학적인 탐문으로 이어간다. 그는 카스파에게 놀라운 통찰력을 제공함으로 서구 문명의 큰 축인 이성과 종교에 도전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문명을 조롱하는 ‘문명화된 카스파’와 문명화의 비극을 목도한다. 헤어조크는 문명과 비문명의 경계에서 인간의 순수성을 포착해 낸다.     헤어조크 감독은 카스파 역에 브루노 슐라인슈타인이라는 43세의 비전문 배우를 기용했다. 그는 평생 보호 시설에서 보냈고,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음악적 재능이 있었다. 그의 삶을 다룬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익히 알려진 인물이었다.     슐라인슈타인은 연기 이상의 것을 연기한다. 순수하고 교활한, 그리고 선량하고 악의적인 카스파의 장난기를 과장하지 않고 침착하게 표현한다. 젊은 카스파를 연기하기엔 나이가 좀 많긴 했지만 카스파 만큼이나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이 배우는 코믹한 카스파 역을 이질감 없이 잘 소화해 냈다. 낯선 세계에 휘둥그레진 어린 그의 눈은 영화의 중심 이미지이다.   헤어조크는 50년 전 사회 제도 또는 체제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사람들이 감수해야 하는 고통, 그리고 권력에 대한 민중의 두려운 심리를 리얼하게 파헤쳤다. 상상력과 지성에 기반한 이 영화는 후세대 거장들인 데이비드 린치의 ‘엘리펀트 맨’(1980), 라르스 폰 트리에의 ‘바보들’(1998),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최근 작품 ‘푸어 씽스’(2023) 등의 영화들에 영감을 주었다. 상류층 엘리트 계급이 주도하는 사회 제도가 그들 외 다른 계층의 사람들에게 고통의 삶을 안겨 주고 있음을 비판한 영화들이다.     명상적이며 가슴 아픈 담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는, 예의 바른척하는 지성인들의 학문과 이성은 문명의 오만함이며 혼돈이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헤어조크는 이 영화를 통해 삶을 살고자 했던 카스파를 ‘학문적 창조물’로 인식했던 상류사회의 오만을 반성하고자 했다.     유튜브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김정 영화평론가비판 문명 바보 카스파 칸영화제 그랑프리 서구 문명

2024-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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